본문 바로가기
정보 이야기

주유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기

by 이은주 2021. 6. 13.
반응형

평소에 삼국지를 좋아하기도 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연의에 대한 내용과 실제기록에 대한 것을 정리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삼국지 내에서 드라마 게임 등 매력있는 인물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주유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참고로 뭔가 게임에서 멋있게 나왔다고 느꼈습니다. 

 

삼국지 소설에서는 제갈량에게 조금 떨어지는 능력과 시기심을 가진 인물로서 강조된 느낌이 강한데 소설과 실제의 차이는 어떤지 아래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조금 긴 글이 될 수 있으니 이 점 참고부탁드립니다. 

 

저번글에는 두번에 걸쳐 위연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았다면 이번글은 주유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해보는 글이 될것이다 평소에 주유라는 인물을 좋아하기도 하고해서 이번 기회에 글을 쓰려고 한다 주유는 175년에서 210년 중국 후한 말기의 군인으로 자는 공근이며 여강군 서현 사람이다 태위 주충의 조카로 고조부 주영 이래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 출신이다 여기까지가 간략한 설명이고 지금부터는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면 청년기에는 초평 원년 190년 손견이 동탁을 치고자 거병할때 서로 집 옮기면서 동년배인 손책과 주유는 친교를 맺어 단금 즉 금속 끊을 정도로 굳은 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한자 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손책과 주유가 친하다는것을 보면 주유도 활동시기가 빠른것 같다고 판단된다 손견이 죽고서 원술은 주유의 종부 주상을 단양태수로 임명하였고 주유도 이를 따라갔는데 원술 휘화 손책이 강동을 치러가면서 편지로 주유를 불렀고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손책을 맞았다 이후 손책을 따라 후한의 양주자사 유요의 대 원술 항전의 최전선인 황강과 당리구에 두준하던 우미 번능 장영을 무찔렀고 장강을 건너 말릉 지키던 착용과 설례도 깨부쉈으며 호속과 강승으로 넘어가 유요의 치소 곡아로 들어가자 유요는 달아났다 손책은 자신은 화계로 나아가면서 주유에게는 단양군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후 원술은 단양태수를 원윤으로 교체하고 주상과 주유를 수춘으로 불러들였고 주유를 장군으로 쓰려하였으나 주유는 원술을 낮게 보고 이게 옳은 판단이 되었다 나중에 동쪽으로 가고자 여강군 거소국의 현장 거소장을 자청했다 거소장 시절에 노숙에게 군자와 식량을 청했고 노숙이 가진 곡식의 절반인 3천곡을 흔쾌히 내어준 일을 계기로 노숙과 친교를 맺었다 손책은 주유를 환영하고 건위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주유는 여강군에서 민심을 얻었으므로 우저를 지키면서 나중에는 춘곡장도 겸임했다 역시 능력이 있다는것을 알수있는 기록이다 손책은 형주를 노리고 주유를 주오군 겸 강하태수로 삼았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양주 북부의 환현을 공격했다 이때 교공의 두 딸 가운데 언니 대교를 손책이 아내로 삼았고 주유는 여동생 소교를 아내로 섬았다 이부분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이교는 교현의 딸로 강동의 이교라고 알려져있어 언니는 대교 여동생은 소교로 불려 절세의 미녀로 불리고 있었다 건안 4년 199년 손책을 따라 원술 사후 독립 세력을 유지하던 여강태수 유훈을 무찔러 여강에서 쫓아냈고 유훈을 돕는 강하태수 황조도 격파했다 여강태수 유훈이 손책의 꾐에 빠져 상료로 군을 낸 사이 손책은 손분 손보 형제에게 평택에서 유훈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주유와 함꼐 유훈의 본성인 환성을 공격하여 이겼다 돌아오면서 예장과 여릉을 평정하였고 파구에 주둔했다 건안 5년 200년 손책이 급사하면서 남동생인 손권이 그 뒤를 이었다 주유는 중호군으로서 장사 장소와 함꼐 온갖 일을 관장했가 이 무렵에는 손권과 그에게 의탁한 사람들 사이에 군신관계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장소와 주유등이 손권을 대업을 이룰만 하다로 하였으므로 실제로 손권은 조조 유비와 같은 대단한 인물들에 잘 대항하였다 사람들이 손권에게 심복하게 되었다 건안 7년 202년에는 조조가 전년에 원소를 무찌른 위세를 앞세워 손권에세 지방관의 아들을 중앙직에 두어 일종의 볼모로 삼는것 즉 임자를 보내도록 꾸짖었다 장소나 진송 등은 우물쭈물하여 결단하지 못했는데 손권의 뜻은 볼모를 보내지 않는것이었고 주유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밝히자 손권의 모친도 찬성하여 결국 볼모를 보내지 않았다 건안 11년 206년 마둔과 보둔을 쳐 그 우두머리를 효수하고 포로를 잡아왔으며 황조가 등룡을 보내서 시상현을 공격하자 이를 쳐서 등룡을 사로잡아 오로 압송하였다 건안 13년 208년 봄에 손권이 황조를 칠 때 정부대독이었다 연도별로 알아보고 있는데 확실히 몰랐던 부분도 많이 보인다 그 다음은 적벽대전 시기인데 이때는 조금더 아는 부분일 것같다 저번에 쓴 글이기도 하고 이 해 9월 하북을 통일한 조조가 군대를 인솔해서 남하하고 형주자사 유종을 항복시켜 그 병사를 흡수하면서 수병과 보병 아울러서 80만이라고도 하는 대군이 되었다 이 사태 당시의 손권 진영에서는 조조가 후한의 승상으로써 대의명분을 갖추고 있고 장강의 지리적 이점도 조조가 형주를 얻고 유표의 수군을 얻는 바람에 없어졌으므로 항복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유는 노숙과 함께 의견을 같이 해서 싸움을 주장하였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결정을 하는것이 대단한것같다 주유는 조조를 후한의 적으로 규정하여 조조의 대의명분을 부정하였고 또 조조군에 있는 많은 불리한 점과 대항하는 자군의 이로운 점 등을 설명해서 이에 뜻을 얻은 손권은 조조에게 대항하는 일을 결단했다 글이 길어지게 되어 주유의 대한 이야기는 다음글에서 더 다루어볼것이고 적벽대전 시기 두번째부터 시작할것 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