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 이야기

장판파전투에 대한 이야기

by 이은주 2021. 5. 11.
반응형

저번글까지는 삼국지의 3대대전이라 할수있는 관도대전 이릉대전 적벽대전에 대하여 꽤나 길게 알아보았다 여러모로 나에게는 의미있는 작업이었는데 이번글부터는 삼국지에 있는 전투나 기타 여러가지 흥미있는것에 대해서 글을 작성할것이다 이번글은 장판파 전투에 대하여 작성할것인데 최근에 삼국지 영걸전이라는 게임을 하였는데 장판파전투에서 정말 엄청난 병력이 몰려온다 뭐 다른 매체같은 경우에서도 조운이 조조의 대군사이로 뛰어들어가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구한것이나 장판파의 다리를 이용해서 장비가 대군을 막아낸것들이 이런식으로 꽤 유명한데 어쨌든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글을 시작하겠다 장판파전투란 중국 후한말기 건안13년 208년에 조조가 신야의 유비를 10만 병사를 이끌고 공격한것을 말한다 장소는 형주 당양 장판파이고 현재로 치면 후베이성 징먼 남쪽이라고 하는데 양군의 전투가 벌어지게된 일련의 이야기의 무대가 된곳이 형주 남군 당양현의 장판이였기 떄문에 장판파전투 혹은 당양전투라고 한다 장판파 전투의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면 건안 12년 207년 후한의 승상인 조조는 화북을 평정하고나서 형주지역으로 그 눈을 돌렸고 당시 형주는 일대 세력을 구축한 형주 자사 유표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형주의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인물과 달리 실제로는 상당히 영향력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조조는 형주지역에 자신의 일족이자 충신인 하후돈을 대장으로 삼고 이전과 같이 별동대로 파견하였으나 박망파 전투에서 유비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후에 박망파 전투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 예정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갑자기 유표가 병으로 쓰러지게 된다 생전에 후계자 문제에 화근을 남긴 유표였기 때문에 그의 사후 가문의 분열이 초래되었고 조조에게는 쉽게 형주가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옛날에는 원소도 그렇고 유표도 그렇고 후계자 문제가 참 영향을 많이 끼친것같다 유표 사망 후 형주의 유력 호족이었던 채씨가문의 수장인 채모를 필두로 형주 유력호족은 책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채모의 누이였으며 유표의 후실이었던 채씨부인과 공모하여 유표의 차남인 유종을 옹립하고 대신 유표의 유언으로 본래 가문을 상속받아야 했던 장남 유기를 버리고 유종을 정식 후계자로 삼아 가문을 계승시켰다 이때 형주의 내분을 지켜본 조조는 약 10에서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았다면 이제는 삼국지 정사에서의 장판전투에 대하여 알아볼것이다 가문을 계승하여 조조에 대해 대항의사가 없던 유종은 유비와 함께 조조를 막아봐야 결국 형주는 유비의 차지가 된다는 부손의 진언에 따라 조조가 신야에 도달하자 바로 항복하였다 번성에 주둔하던 유비는 불시에 갑자기 양쪽으로 포위당한 형국이 되자 몹시 당혹하여 유종이 있었던 양양으로 향하였다 제갈량은 유종을 공격하여 형주를 지배하자고 진언하였으나 유비는 유표의 은혜를 생각하여 이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유비는 유종을 불렀으나 유종은 두려워하며 나가지 않았다 유종입장에서는 당연한 대처라고 볼수있다 이에 유종의 측근 및 다수의 형주사람들은 유비에게 귀순했다 많은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 움직였기에 유비는 하루 10여리 4에서 5키로미터 밖에는 전진하지 못했고 유비는 관우에게 수백척의 배에 그들의 일부를 탑승시켜 강릉으로 보내고 미리 접선준비를 하게 하였다 조조는 유비가 군수물자가 풍부한 강릉을 점거하는걸 두려워해 수송부대를 후방에 배치하고 신속하게 양양을 점거하였다 조조는 조순과 함께 몸소 5000의 정예기병대인 호표기를 이끌고 하루 밤낮으로 유비를 추격하였고 이들은 당양현 장판에서 유비군의 후미를 급습하게 된다 유비가 이끌던 피난민 무리는 급습에 붕괴되어 흩어져 곧 조조군에게 사로잡혔다 조조가 이렇게까지 서둘러 급습할거라 생각하지 못한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과 함꼐 수십기의 병력만을 데리고 도주하였으며 이떄 피난민 사이에 있던 유비 가신들의 친족들과 유비자신의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하였다 유비의 가신인 서서의 모친이 사로잡혀서 그가 유비에게 이별을 고하고 조조진영으로 투항하였으며 조순은 유비의 두딸을 노획하였다 이런 혼란속에서 조운은 호표기 사이로 들어가 아두 후에 유선이라는 인물과 감부인을 구해내어 지키면서 그들의 추격을 뿌리쳐 무사히 합류하였으며 이후 아문장군이 되었다 장판파 전투에서 조운이 조조의 대군으로 들어가 아두와 감부인을 구해내온것은 진실이었던것이다 한편 장비는 후군을 맡아 조조군의 추격을 막기위하여 20여기를 이끌고 나서 강을 방패삼아 다리를 끊어버린후 나는 장비익덕이라 누가 나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는가 라고 외치자 조조군은 겁을 먹어 누구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였고 유비는 귀중한 시간을 벌수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비를 놓친 조조는 추격을 단념하고 곧바로 강릉을 점거하게된다 장비로 다리에서 대군을 막아낸것도 정사에서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유비는 한진에서 관우가 이끌던 선단을 만났고 또한 유표의 장남인 강하태수 유기의 군사와 만나 함꼐 유기의 본거지인 하구에 도달하였다 유비는 손권의 가신인 노숙을 만났고 제갈량을 오나라에 파견하여 손관과의 동맹을 맺었다 손권은 수만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유비와 함께 적벽에서 대승을 거두어 조조군을 격퇴한다 여기까지가 삼국지 정사에서 기록된 장판파 전투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에서 살펴본것처럼 조운이 조조의 대군에 뛰어들어 아두와 감부인을 구해내온것이다 장비가 다리에서 마찬가지로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것이 정사의 기록에 나와있어서 확실히 대단한 인물들이라는것을 다시한번 알게되었다 그럼 이어서 삼국지 연의 속의 장판파 전투에 대해서도 일부 알아보면 당시 선대 유표의 비호하에 있으면서 객장으로 신야를 수비하던 유비는 유종의 항복으로 인하여 최전선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이것을 홋기로 본조조군의 공격 앞에 앞뒤가 포위된 신야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조조는 자신을 반대하던 신하 공융을 처형하고 50만 대군을 일으켜 제1대는 조인과 조홍 제2대는 장료와 장합 제3대는 하후돈과 하후연 제4대는 우금과 이전 자신은 제5대를 이끌었고 각기 10만의 군사를 지휘하였으며 맹장 허저를 절충장군으로 봉하고 군사3000여명을주어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야말로 조조군 명장들이 총출동한것이다 그리고 제 1대 대장 조인과 조홍을 유비가 도망쳐 수비병도 산산히 흩어져서 글자 그대로 텅빈 성이 된 신야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유비휘하의 참모인 제갈량의 계략이었다 이 제갈량의 계략에 대한 내용부터는 글이 길어질것같아 다음글에 써야 할것같다 어쨌든 이번글을 쓰면서 장판파 전투에 대한 기록에 대하여 한번더 알게 될수있어서 기분좋게 글을 작성할수있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