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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이야기

관도대전 그 후

by 이은주 2021.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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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글에서는 관도대전이 일어난 과정과 관도대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글을 써보았는데 이번글에서는 관도대전 그 후의 이야기와 기타 여러가지에 대하여 글을 작성할 예정이다

 

 

 

앞서 글을 길게 써놓았으나 적어놓아야할 분량이 많아 나누어서 쓰게 되었다 내가 해본 몇가지 삼국지게임에서는 관도대전이 그렇게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기도 하고 관도대전 이 이릉전투나 적벽대전 만큼이나 중요한걸 알게되어서 많은 양을 작성하게 된것이다

 

어쨌든 그럼 글을 시작해보면 관도대전에서의 원소의 패배를 본 기주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패군을 수습하여 귀환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군현을 공격해 모두 평정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면 관도대전 한번으로 원소의 세력이 단번에 무너진것이 아닌것을 알수있다 원소는 또한 전풍을 처형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원소가 나중에 비판을 받는 원인이되었다 원소와 합류하지 못한 군사들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사로잡히고 마는데 조조는 사로잡은 병사들도 모두 생매장해 죽였다 음 서주대학살이 생각나는것 같다 이때 죽은 원소의 군사들은 7만에서 8만이라 하는데 조조군의 병력이 1만이었다고 기록된것과 비교해보면 조조의 승리를 미화하기 위해 원소의 병력을 과장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조조 역시 원소의 침입으로 인하여 영내에 피해를 입어 내부 정리를 시간으로 써야 했으므로 관도대전 이후 원소와 조조 모두 황하를 두고 군대를 1년간 대치하게된다 202년 관도의 패전 이후 건강이 악화된 원소는 병이들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 가장 강력한 군벌중 하나인 원소의 죽음 이었다 원소의 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원소의 조카 원담은 원상에게 공공히 불복하며 자신이 원소의 후계를 이어받을것을 주장하였고 이로인해 원소의 세력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더 알아보면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나 원소가 그를 자신의 죽은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호적상으로는 원소의 조카카 된다 어쨌든 이에 조조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하였으나 원상에게 여양에서 격파당하며 철수하게된다 하지만 원담이 원상을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발발하였고 이 틈을 타 조조는 원담과 연합하고 다시 원상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로써 원소가 세운 정권은 완전히 붕괴외었고 조조는 뒤이어 원담과 싸워 그를 죽이고 기주를 평정하였다 원담과 원상의 내부분열이 조조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조조는 당대 최대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은 이미 삼국지의 결과가 어느정도 정해졌다는 의견도 많다 여기까지가 관도대전 그 후의 이야기이고 그 다음 관도대전에서의 의문점을 알아보면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병력수의 의문점이다 관도 병력에 대해선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본문에 원소군은 10여만 조조군은 1만에 불과하다고 적었으나 배송지는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첫번째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때 5천의 병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 후 황건적의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여러세력들을 병합하였는데 겨우 1만이라는게 너무적다는것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두번째로 원소는 수십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여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않는 전력으로 이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번째로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라고 하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누어 원소군을 공격할때에도 이것이 저지된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수는 없었던 까닭인것이다 네번째로는 원소군이 붕괴된뒤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을 사로잡았다고 생갹할수 없다는게 가장 큰 이유로 나온다 삼국지 저자인 진수가 왜 책에 그렇게 기숳했냐는것에 대해서는 조조의 군략을 뛰어나보이기 위해 과장하여 쓴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즉 위서 국연전에는 도적의 무리를 격파한 상황에서 이것을 보고할깨에는 상주문에는 1을 10으로 과장해서 기재하는것이 그 시대 통과의례라고 일지에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놀랐다 그래서 연의에서는 조조군은 7만 원소군 70만이라고 기술한것도 있다 덧붙여서 보면 이전투 후에도 세력적으로는 여전히 원소가 우세하였다 원씨가문의 멸망을 결정짓게 만든것은 원소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후 후계자 문제로 어린 후계자 원상의 집권으로 인한 내부분열이었다 기타 사항으로는 중국 삼국시대에서는 중요한 전투이나 삼국지 연의에서 중요하지 않게 다루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벽대전에 비해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삼국지 연의 에서는 관도대전에 서술의 관점이 유비가 원소에게 벗어나는일이나 관우의 오관육참에 맞추어져있기에 읽고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나도 관우가 안량 문추를 베었다고 알고있었지 이것이 관도대전에서의 일이라는것은 모르고있었다

 

 

 

저번글에서 다 쓰지 못한 글을 추가하자면 처음 조조는 원소의 지원으로 세력을 성장시킬수있었고 이후로 줄곳 조조는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있었으나 조조의 독단적인 헌제 옹립을 계기로 인햐여 원소와 결별하였고 대립하였으며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뒤 정병 10만을 선발하여 조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떄 원소의 참모 전풍과 원소군의 저수등은 아군이 공손찬과 싸우느라 국력이 피폐해진 상태이고 천자를 끼고 있는 군대를 치는것은 의로움에 위배된다고 하여 원소의 출진을 만류하였으나 당시 원소에게 크게 중용되어있던 곽도등은 객관적으로도 조조의 국력을 하북의 강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군에 비해 크게 떨어지며 황실과 대적하는것이 아니라 단지 칼날이 조조만을 향하는것이므로 지지를 받을지언정 의로움에 위배되는것이라고는 할수 없다는 이유들 등어 이를 반박하였고 오히려 저수의 위세가 지나치게 당하다는점을 들어 그를 탄핵하였다 원소는 곽도와 멀리하는편이 좋았을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원소는 이를 받아들여서 저수의 권한을 저수 곽도 순우경으로 삼분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순우경이라는 인물이 재미있는점은 연의에서는 순우경에게 조조가 코와 귀 손가락을 베어 원소에게 돌려보낸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사실 조조는 처음부터 순우경의 재능을 알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순우경이 거절하자 어쩔수 없이 죽인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게임에서는 조조군에 순우경이 합류되어있는걸 몇번 본적이 있다 장판파전투였던걸로 기억한다 그럼 여기까지가 내가 작성한 관도대전 그 후의 이야기와 기타사항에 대한것을 마치겠다 이전글에서는 백마전투와 관도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필요하신분들이 있으시면 한번 봐주시는것도 좋은 선택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두개의 글에 걸쳐 관도대전에 대해서 알아보며 글을 써보았는데 확실히 대충알고있는것을 글로 다시 작성해보니 몰랐던 점을 다시 알수있어서 좋았고 몇번 더 이러한 글을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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