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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이야기

이릉대전에 대한 이야기

by 이은주 2021.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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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 관도대전과 관도대전 전후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쓴 후 이번 글부터는 이릉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면 이릉대전은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의 중요 전투라 할만하다 

이릉대전은 효정전투라고도 불리는데 효정전투라는 말은 이 글을 작성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어쨌든 221년 촉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과 그 공격에 의해 참패하여 백제성까지 물러나게 된다 

여기까지 대략적인 개요였고 좀더 들어가서보면 이릉대전의 배경은 주유가 사망한 후 손권은 주유가 지키고있던 남군을 유비에게 임대했는데 손권측은 적벽대전의 공로가 자신들에게 있는것으로 여기고 유비는 자신들의 묵인하에서 형주남부를 점거했으므로 형주전체를 유비에게 임대하였다고 여겼으나 유비 측에서는 적벽대전은 어디까지나 공동작전이었으며 형주 남부는 자력으로 획득한것으로 여겼다 양측다 주장하는바가 있었다 익주점령후 손권과 유비는 형주 반환 문제를 놓고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강하장사 계양의 세군을 손권에게 반환하고 강릉 무릉 영릉을 유비의 영지로 삼는것으로 협약을 맺게된다 219년에는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는것 과 꺠를 맞추어 관우가 북상해서 위를 공격하였다 그 떄 관우는 승리하여 우금과 그 부하병력들을 포로로 잡고있었는데 그들이 먹는 식량을 감당할수없는 지경까지 갔다 이에 관우는 손권의 영지인 상관에서 군량 보충을 위해 노략질을 하였다 조조였으면 병력들을 매장했을텐데 어쨌든 이러한 관우의 노략질은 손권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에 손권은 위나라와 손을 잡고 관우는 위군과 오군의 협공받아 결국 패전하여 손권에게 처형되었다 이러한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제갈량 조운을 비롯한 다수의 중신들은 보복전을 일으키는것에 찬성하지않았으나 유비는 장비와 만난후 오를 직접 공격하기로 뜻을 굳혔다 이는 유비가 인망이나 의리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때 장비는 범강 장달에게 암살 당하고 이들은 장비의 목을 사지고 손권에게로 달아나 유비의 손권에 대한 적의는 더욱 강해졌다 관우를 처형한 이후부터 유비의 침공을 예상해온 손권은 위의 황제가 된 조비에게 형식적으로 신종하며 촉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 시기에 손권은 조비로부터 정식으로 오왕으로 책봉된다 221년 여름 후한이 멸망하고 제위에 오른 유비는 승상 제갈량을 수도인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주둔시켜 후방을 맡긴후 직접 수만 병력을 데리고 오나라로 공격한다 한가지 참고하자면 정사에의하면 감녕은 이릉대전 발발전 사망하였다 이릉대전에서의 병력을 비교해보면 촉은 10만 오는 6에서 7만 정도이고 촉은 주력군 규모만 4에서5만에 달하며 유비의 형주지배를 지지하며 촉순에 합류한 오계의 무릉만이 형주 호족 군세같은 비정규군들까지 모으면 최대 10만이라는 견해가 있다 오나라는 육손군 5만과 손권이 보낸 지원군1에서 2만이다 전쟁의 경과를 보면 유비는 오반 풍습등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로 진격을 시작하여 육손 이이 유아 등이 지키는무성과 자귀성을 격파하며 함락시켰다 자귀에 본영을 설치한 유비는 222년 정원 오반 진식 등에게 먼저 수군을 이끌고 이릉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손권으로 부터 전군을 위임받은 육손이 이들을 상대하는 동안 유비 본인은 본대를 이끌고 육로로 진군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육손이 눈치챘기떄문에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않았다 222년 봄부터 유비는 다시 공세를 펼쳤다 황권은 형주로 더욱 깊숙히 쳐들어가면 전세가 불리해질경우 후퇴가 어려울것을 우려해 유비에게 전선지휘를 자신에게 맡기고 후방에 머무르도록 권하였으니 유비는 이를 기각하고 황권에게 수군을 이끌고 장강 북안을 따라 계속해서 하류로 내려가도록 한후 자신은 이도를 따라 진군하여 손환을 이릉성으로 몰아놓고 성을 포위했다 손환이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육손은 요청을 받아들일것을 주장하는 부장들에게 내게 촉군을 물리칠 계략이있으니 참으라고 말하며 구원요청을 묵살하였다 이 시점 육손은 촉군에게 밀려 삼협내의 모든 거점을 잃고 후방인 강릉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진을 치고있었고 많은 장수들은 육손의 군사적재능을 불신하여 육손은 부하장수들에게 손권에게세 받은 검을 내보이며 권위를 세워야 할 정도였다 제갈량도 이러한 행동을 한것으로 기억한다 유비는 승세를 타고 효정으로 진군하면서 마량을 만족에게 보내어 이들을 회유하였고 여기에 사마가등이 호응해 오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육손이 요새화한 진영에서 수비로 일관하며 촉군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자 전선은 교착되었고 촉군의 사기도 점차 떨어지게 된다 이때 유비는 전선 주변부에 50여개의 진을 한 일자모양으로 나열해두고 유사시에는 서로 지원하게 하였는데 이를 전해들은 조비는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많은 진영들을 세워두고 전쟁을 하려는것인가 유비는 반드시 패배하게 될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잘 싸워놓고 왜 마지막에 저런 진영을 새웠는지는 의문이다 222년 6월 육손은 촉군의 강약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규모 병력으로 촉의 진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공격에 나섰던 오군은 촉순의 반격을 받고 몹시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육손은 여러진영에 분산된 촉군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계하는지 파악하게되었다 이무렵 유비가 이끄는 촉군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비교적 시원한 숲으로 진영을 옮긴 상태였는데 이를 본 육손은 대대적인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더해 육손은 수군을 적진으로 급파하면서 육상에서도 전군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촉군 진영들의 주변에 불을 놓은후 맹공을 가하였다 수많은 진영들이 화공과 기습을 받는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몰랐던 촉군 진영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연락이 두절괸 상태에서 각개격파식으로 무너졌다 전황이 위급해지고 진영들이 서로 도울수없다는것이 드러나자 유비역시 본진을 포기하고 퇴각할수밖에 없게되었고 수군은 육군의 대패로 인해 수십여 진영이 삽시간에 함락당하자 퇴로가 끊겨 장강을 거슬러 올라사도 오군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이 없게 되었으므로 지휘관인 황권은 위에 항복하고 오군은 수많은 군선과 병기를 얻게된다 이때 40여채 이상의 촉군 진영들이 오군의 손에 떨어졌고 유비는 효정과 이릉에서 퇴각한 후 다시진을 세우고 패잔병을 수습해 오군에게 대항해보려하였으나 이미전세는 기울어 이 시도 역시 오군의 공격으로 인해 무산되어 유비는 백제성까지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촉은 풍습 장남 부동 등 다수의 무장들과 왕보 마량등의 무관 등 수만명의 인력을 잃었다 오나라와 사이가 나빠 촉에 편에 선 소수민족들도 피해를 입고 사마가도 죽었다 이번글은 여기까지 작성하고 다음글은 이릉전투 전후 과정이나 기타 여러가지 이야기에 대해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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