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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이야기

조조의 서주침공

by 이은주 202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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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글에는 제갈량이 처음 등장하여 활약한 박망파 전투에 대하여 글을 작성하였고 이번글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조조의 서주대학살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서주침공이라고도 하는데 서주침공은 후한말의 군벌 조조가 서주자사 도겸이 자기 아버지 조숭을 죽인것을 빌미로 하여 서기 193년에서 194년에 걸쳐서 서주에 대한 토벌을 행한 사건이다 조조가 저지른 서주 민간인학살에 초점을 맞추어서 서주대학살이라고 많이들 알고있다 언론이나 매체 등에서도 조조라는 인물을 나타낼때 꼭 들어가는 사건이라고 할수있다 침공은 193년 194년에 걸쳐 두번이루어졌으며 두번 모두 서주의 여러고을을 점령한 조조군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학살을 저질러서 모두 합하여 10000명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고한다 엄청난 숫자라고 할수있다 이러한 조조의 서주침공의 배경으로는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한 배경은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살해당한사건에서 시작된다 조숭은 은퇴한 이후 고향인 초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탁토벌전 떄 그 일대가 전쟁터가 되자 조숭은 싸우러 나간 조조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을 데리고 서주의 낭야로 이사를 갔다 그러던중 조조는 연주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군벌로 성장하였고 193년 아버지 조숭을 연주로 모시고 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숭을 비롯한 조씨 가문 사람들은 연주와 서주의 주 경계 부근에서 살해당하였다 조숭의 죽음에 관해서는 두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서주자사 도겸이 부하를 보내서 조숭을 죽였다라고 하는것이고 다른 기록에서는 도겸이 조조를 두려워하여 조숭을 지키라고 부하들을 보냈는데 그 부하들이 조숭의 재물을 노리고 조숭을 죽인뒤 도망갔다고 하였다 조조의 입장에서는 어쩄든 조조의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서주로 출발하였다 앞에 설명한것처럼 서주침공은 두차례로 행해졌다 제1차 서주침공 제 2차 서주침공으로 제1차 서주침공부터 알아보면 193년 여름 또는 가을 조조는 병력 불상의 군대를 이끌고 서주를 공격하여 10개 이상의 성을 함략시켰다 서주자사 공관 소재지인 팽성을 함락한 조조는10000명이상을 죽였다고한다 도겸은 섬성이라는 곳으로 도망갔다 도겸을 잡아들이는데 실패하고 식량도 떨어지게 된 조조는 군사를 돌리게되고 철수하려는 길에 취려 수릉 하구를 약탈하였다 팽성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들이 이들 외곽지역으로 몰려들었었는데 조조는 남녀 합쳐 민간인 100000명을 죽였고 그들의 시체로인해 사수 강물이 막힐 지경이었다 정말 엄청난 수라고 할수있다 조조군은 민가의 닭과 개를 잡아먹고 집을 허물어뜨려 촌락들을 폐허로 만들고 연주로 돌아갔다 그곳에 살고있던 주민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던것이다 그럼 제 2차 서주침공은 어떠하였을까 194년 봄 조조군은 서주를 재침하였고 도겸은 청주자사 전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전해는 구원병 수천여명을 파견하였는데 그 지휘관은 유비였다 도겸은 조조의 포위망 남쪽을 뚫고자 하여 유비를 예주자사로 추대하고4000여명의 군사를 그에 딸려 보내었다 유비는 도겸의 부하 조표와 함꼐 담 동쪽에 주둔하였다 조조군은 냥야와 동해를 약탈하면서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것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비가 이끄는 도겸군과 조우하여 이를 무찔렀다 유비를 패퇴시킨후 조조는 근처의 양륙도 점령하였다 조조의 무차별 공격이었고 결과적으로 조조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승리로 이끌었다 조조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짓밟히던 서주는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에서 장막과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여 여포를 조조와 대립하게 함으로써 살아날수 있었다 근거지가 여포에 의하여 불안정하게 되자 조조은 도겸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고 여포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돌리게 된다 이장면은 삼국지게임을 하다 나온것이 생각이 난다 공세를 퍼붓다가 갑자기 총퇴각하는 조조 어쩄든 결과는 조조가 돌아간 뒤 유비는 전해에게 돌아가지 않고 도겸의 곁에서 남아있다가 194년 도겸이 사망하자 도겸의 유언에 의해 서주자사직을 위임 받았다 이 전쟁으로 공손찬의 부하로 떠돌던 유비는 독립적인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고 위험한 피난길에 오른 거대 피난민 무리의 후미에서 극소수의 병력이었으나 성공적인 보호작전을 수행하여 현덕이라는 호를 얻는다 이글을 작성하면서 알게된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명성을 기반으로 최종적으로는 촉한을 건국하게 되는 발판이 된다 유비로서는 상당히 운도 따라주었다고 할수있다 도겸이 죽고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이 몇번 더 나오는것을 보면 유비의 인덕으로 유명한것이 도움이 있었을것같다 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더불어 서주주민들이 학살을피해 난민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는데 상당수가 형주와 교주등으로 피난을 떠났고 이들 가운데 제갈근 제갈량 형제 장소 등 상당수의 인재를이 평생 조조에게 적대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촉한과 오나라의 건국에 크게 키여하였기 때문에 위나라 조조의 중국통일을 미뤄지게 되는 시발점이 된것이다 여기까지가 서주침공에 대한 이야기이고 서주성전투라는 전투 측면에서 조금더 자세히 알아보면 서주성 전투는 193년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여 조조와 도겸 도겸을 도우려는 제후들이 싸운 전투로 조조가 여포의 공격으로 한발 물러나군사를 물리면서 도겸과 지원군이 사실상 승리하였다 배경에는 당시 조조는 청주의 황건적 잔당들을 흡수하여 30만명의 군사를 얻고 정욱과 곽가들의 걸출한 인재들이 모여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이에 서주태수 도겸은 조조와 친분을 얻기위하여 부하 장개에게 5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조의 아버지 조숭과 조조의 가족들을 모시게 하였다 그러나 장개가 재물에 눈이 멀어 조숭과 그 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재물을 탈취해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고 화가난 조조는 아버지 조숭의 원수를 갚기위하여 도겸을 공격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1차 전투와 2차 전투가 있었고 그 사이에 북해전투와 지원군의 연합이라는 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결과 및 영향으로 조조는 이후에 여포에게 연주를 빼앗겼으나 북양전투에서 승리하여 연주를 다시 되찾는다 유비는 194년 도겸의 부탁으로 도겸이 병사하자 서주자사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고 195년 복양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해 온 여포를 받아들인다 여기까지가 이번글의 내용인 조조의 서주 침공의 배경과 1차 서주침공 2차 서주침공 과 결과를 다루어보았고 추가로 전투에서의 측면까지도 보았다 서주대학살이고 너무나도 유명한 서주침공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게 되어 좋았고 삼국지라는게 여러가지로 흥미로운점이 여전히 많은것 같다 그럼 이번글은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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